2일차 (계속)
산케이엔 (三渓園)
첫 번째 목적지는 산케이엔입니다.
뭐 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고, 구글 맵으로 요코하마 해변을 둘러보다가,
녹색으로 넓은 곳을 발견해서 여행 목적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주차장은 널널했지만 봄이나 가을 같은 극성수기라면 아슬아슬할 것 같기도 합니다.
주차요금 1,000엔, 입장료 900엔입니다. 상당히 비싸네요.
약 175,000 평방미터(약 53,000평)에 달하는 거대한 정원인 산케이엔은 하라 토미타로(原富太郎, 1868-1939)가 세운 곳입니다.
하라 토미타로는 아오키 히사모리(青木久衞)의 아들로 원래 성이 '아오키'였는데, 요코하마의 거상이었던 하라 젠자부로(原善三郎)의 손녀인 하라 야스(原屋寿)와 1892년 결혼하면서 하라 가문으로 들어갑니다. 오잉? 일본에서는 결혼하면서 여성이 남성의 성을 따라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하라 젠자부로는 생사(生糸, 실) 무역으로 큰 성공을 이룬 실업가이자 요코하마의 유지였습니다. 그러나 가족 사정이 이래저래 있었는지, 하라가(家)를 이을 사람이 손녀 야스 뿐이었고, 젠자부로는 "유능한 실업가가 야스와 결혼, 하라가에 입적하여 가업을 이어갔으면 한다" 했나 봅니다.
토미타로는 요코하마와는 꽤 거리가 있는 기후(岐阜)현 출신입니다. 18살의 나이로 상경,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며 아토미(跡見) 여학교에서 교사 일도 겸하고 있었던 토미타로는 그곳의 학생이었던 15살의 하라 야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19세기 끝자락이긴 하지만 나이가 놀랍네요. 아무튼 토미타로가 원래는 장남으로서 아오키 가를 이을 몫이었기 때문에(여러 모로 그 시절답네요)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고, 차남이 있었던 아버지 히사모리는 흔쾌히 승낙했다고 하네요.
아무튼 '하라' 토미타로는 돈도 많이 벌고, 하라가를 크게 세우고, 요코하마의 중책도 맡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모은 돈으로 거대한 저택과 정원도 세웠는데 그게 바로 산케이엔입니다. 산케이(三渓, 삼계)는 토미타로의 호입니다.
원래는 외원만 공개되어 있었고, 내원은 하라가의 사람들이 직접 살던 곳이었다네요. 외원을 공개한 이유는 토미타로가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들끼리만 즐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던 설명문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도 나무와 담장에 둘러싸여, 외원에서 내원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래는 참고한 글입니다.
두시간 반 정도 있었습니다. 안에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12월 초에 갔는데, 날씨도 최고기온 18도쯤 되는 따뜻한 날씨이고, 비수기라 사람도 많이 없어서 좋더라구요.
아름다운 정원이었습니다.
바다의 공원 (海の公園)
14 km (36분) 정도 운전해 도착한 곳은 바다의 공원입니다.
일본어로는 '우미노 코엔(うみの こうえん)'이라, 절충하여 '우미노 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봅니다.
요코하마의 해안을 구글 지도로 훑는데, 좀처럼 '바다'를 있는 그대로 즐길 만한 곳이 없더라구요.
크레인이 높게 솟은 항구, 아니면 낚시터, 아니면 그냥 방파제 옆 해안도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기 이 공원을 딱 보고 여기다 싶었죠.
제가 아는 공원은 꽃과 나무의 공간인데, 바다가 있는 공원이라는 게 상상이 안 갔습니다.
조그만 아이들이 어른의 손을 꼭 잡고 모래사장을 아장아장 걷습니다.
파도 앞에 가만히 앉아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고요.
서핑을 마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씩 웃으며 걸어나오는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모래밭을 왕복하며 훈련하는 어느 고등학교의 운동부 아이들.
푸른 하늘에 구름은 엷고, 물결의 틈마다 햇빛이 물장구치며 눈부시게 퍼집니다.
'지금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남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여기가 요코하마시의 남쪽 경계 끄트머리쯤 됩니다. 만(灣) 너머에 보이는 육지는 그 경계 너머, 요코스카시(横須賀市)입니다. 저 공장지대는 요코스카시 북쪽의 나츠시마쵸(夏島町)인데요, 이름의 '시마'에서 알 수 있듯 원래는 나츠시마(夏島)라는 섬이었으나 매립을 통해 연륙되었습니다.
공원은 1 km 가까이 펼쳐져 있어, 천천히 둘러보니 1시간쯤 걸렸습니다.
어라! 오후 3시 반인데 벌써 해가 지네요.
원래는 요코스카 미술관을 들른 뒤에 조가시마에서 일몰을 보려 했습니다.
아쉽지만 미술관은 빼고, 조가시마로 가는 것도 서둘러야겠어요.
조가시마 (城ヶ島)
조가시마에 도착하니 4시 반. 그런데 해가 이미 거의 져 가는 것 같습니다.
서울보다 동경 12.5도쯤 더 동쪽이라, 일몰도 서울에서보다 50분이 빠르다는 걸 놓치고 있었네요.
노을이 하늘 가득 지는 풍경은 못 보게 됐습니다.
아쉬워서 그랬는지 뭔가를 착각해서, 그냥 등대에 올라가지 말자고 결정했습니다.
아마 무슨 입장료가 있다, 아니면 계단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노시마와 헷갈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등대로 가는 길을 잘 못 찾은 것도 있었고, 해가 이미 지면 등대에서 보이는 풍경이 깜깜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구요.
아무튼 등대 옆으로 빠져서, 작은 길을 따라 바닷가로 갔습니다.
조가시마의 북서쪽은 사가미(相模)만이 있는데요, 그 방향으로 쭉 가면 온천으로 유명한 하코네, 그리고 후지산 정상까지 이어집니다.
서쪽이라 일몰을 감상할 수 있고, 후지산까지도 볼 수 있는 관광 명소인 것이지요.
구름이 적어 후지산이 잘 보이는 게 다행이네요.
오후 5시경 바닷가를 떠납니다. 귀갓길은 1시간 반 거리. 뭔가를 먹어야겠어요.
비수기인데다 그나마 있을 관광객도 이미 다 떠나고 없는 시각입니다. 도착했을 때 이미 상점가가 거의 다 문을 닫았어요.
이 시각에 열려 있는 가게는, 파르페 따위를 파는 듯한 조그만 카페 하나뿐입니다.
문을 두드리고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식사가 될 만한 것도 있을까요?"
마스터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잘 못 들으셨는지 두어 번 되물으시더니 일단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가게에 들어서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20세기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와 배우 사진으로 벽면이 빈틈 없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시사이드 하우스(Sea Side House: シーサイドハウス). (구글 지도 링크)
천천히 걸어와 메뉴판을 건네셨습니다.
손으로 적은 메뉴판에는 다행히 필라프도 있네요.
시푸드 필라프가 지금은 안 돼서, 새우 필라프를 주문합니다.
가게에는 저 말고 아무도 없어서, 마스터가 다시 천천히 걸어와 물어보십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이럴 수가! 나 나름 일본어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외국인인 게 금방 보이나 봅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고는 조금 있다가 물으십니다.
"한국은 좋아합니까?"
순간 무슨 질문인가 싶어 눈을 끔벅였습니다.
이거 어쩌면 그거 아닐까요? 이런저런 혐한 미디어를 많이 보셔서, 거기서 묘사되는 한국은 곧 망할 것 같은 지옥도의 풍경인 거죠. 이 분의 나이를 생각하면, 전쟁 전후라든가,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음……. 그러다가 순간 진정합니다. 제가 너무 과장해서 생각한 걸까요? 그래도, 이 질문이 다른 무슨 맥락에서 성립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구요. 아니오라는 답의 가능성을 기대하니까 묻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당장 화를 내고 싶지는 않고요. 이 분도 지금 나한테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고, 내가 이해한 게 맞다 해도 이 분 한 사람의 잘못도 아니고.
그래서 네, 뭐, 당연히 좋아하죠?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군요." 하고 이어지는 말은 없습니다.
어렴풋한 담배 냄새가 괜히 씁쓸합니다. 천천히 밥을 먹고 있으니 손님이 한 명 더 들어옵니다.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시며, 버스 시간이 있어서 급하게 나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음료를 내오며 마스터는 또 묻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말레이시아에서 왔습니다. 유학 중이에요."
"아! 그렇군요."
이 손님에게 나가는 마스터의 질문은 "말레이시아의 인구는 몇 명인가요?"입니다. 뭐라고 대답을 하시니 "아! 많군요." 하십니다. 앞의 일이 있어서 그런지, 질문과 반응 모두 왠지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본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시구나, 싶습니다. 이 손님은 커피를 마시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가게를 나섭니다.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옵니다. 이 분도 문가에서 뭔가를 물어보시고(아마 식사가 되냐는 얘기였던 것 같습니다), 마스터는 이번에도 몇 번 되물어보시다가 들어오라 하십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 "에? 저요? 저, 도쿄입니다. 도쿄에서 왔습니다."
궁금증 하나는 풀립니다. 그냥 모두에게 출신국을 물어보시는 거였구나.
친구와 낚시를 하러 왔다, 근처에 민박에서 잘 예정이다. 이름도 모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행의 궤적이 잠깐 교차하며 한 공간에서 식사를 했다는, 다시는 마주칠 일도 없을 인연에 대해 생각합니다.
아무튼 적당히 식사를 마치고, 마스터가 이런저런 걸 더 물어보십니다.
대학 전공이 뭐였는지를 물어보시더니 전공에서 뭘 배우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십니다.
근데 아까 있었던 회화와는 정말 무관하게도, 이걸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오더라구요.
당황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트를 꺼내 건네십니다.
노트에는 수많은 개념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반도체에 대한 내용도 있고요. 아무튼 지식의 보고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온 손님들에게 이런 식으로 조금씩 채워달라고 하신 거겠지요.
그런데 정말 어떤 걸 설명할지 잘 생각이 안 나고, 해도 점점 지고 있어, 아쉽지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가게를 나섰습니다.
이래저래 개성이 강했던 가게였습니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겠지요.
47 km를 1시간 30분동안 달려 돌아왔습니다. 숙소 주변에 주차를 하고 나오는데 굉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요코마하 역에는 열차가 쉴 새 없이 오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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