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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23.12. 요코하마

2023. 12. 요코하마 - 3. 3일차

3일차

육교와 고가도로 밑으로 물이 흐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차장으로 향합니다. 길은 여전히 헷갈립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이소마루스이산(磯丸水産: 횟집 및 이자카야 체인)이 길라잡이가 되어 줍니다.

아침의 요코하마 역 주변은 퍽 시끌벅적합니다. 강물이 수많은 다리를 피해 흘러갑니다. 비늘 같이 날을 세운 수면에 아침 햇살이 직격해, 단색의 벽에 무늬를 만듭니다.

 

내비게이션 정보.

 

출발하기 전에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내비게이션을 확인합니다.

조가시마에 거의 도착할 즈음, 내비게이션에서 갑자기 길이 사라졌습니다. 자동차전용도로(고속도로)가 끊긴 것으로 내비게이션에는 나오는데, 제 눈 앞에는 아직 길이 수 킬로미터 더 이어져 있었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일단 일직선으로 나아가, 표지판에서 조가시마라는 단어를 찾아 더듬더듬 나아가니 무사히 도착은 했습니다. 확인해 보니 지도 정보가 2019년 제1판이었군요.

 


 

하코네유모토 (箱根湯本)

12월이라 온천에 한 번 몸을 담그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었거든요.

하코네까지 운전해 갑니다. 70 km, 2시간 가까이 소요되었습니다.

 

첫 50 km 가량은 고속도로라 편합니다.

(신사쿠라가오카IC 진입 시에 길을 헷갈려 진입에 실패했는데, 침착하게 진행해서 무슨 골프장 있는 왕복 2차로 길에서 U턴을 해서 빠져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길을 가로막고 직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차를 돌리면서, 이러다 경찰한테 혼나면 어떡하지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하코네로 가는 1번 국도로 접어들면, 고가도로 아래로 아름다운 마을 풍경이 보이고, 눈앞에는 끝없는 자동차 대열이 있습니다. 왕복 2차로로 꽉 막혀, 가다 서다를 반복합니다. 차에 아이들링 스탑 기능이 있는데, 시동을 자꾸 걸면 오히려 환경에 나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차가 너무 많아 보여, 하코네유모토 역 앞에서 좌회전을 해, 산마이 다리(三枚橋)를 건너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경사도 심하고, 길도 좁고, 그래도 온천 마을이라 여유를 즐기고 있는 보행자도 많습니다. 경차를 빌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마음에 절절히 다가옵니다.

 

호텔 후루사토.

 

하코네 온천 마을 안에는 마치 춘천의 닭갈비 거리나 수원의 통닭 거리처럼 온천여관이 줄지어 들어서 있습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거기로 가는 것이고, 아니면 아무거나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가는 것이죠.

 

저는 목적지를 딱 정한 건 아니었어서 그냥 길 따라 가며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성격상, 뭔가 "여기다!" 하는 느낌이 오지 않는 이상 이대로라면 영원히 방황하고 말 거라는 걸 알거든요.

이제 슬슬 좀 정해 볼까 하고 둘러보는데, 후루사토라는 곳이 눈에 들어옵니다.

 

원래는 '오카다'라는 곳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블로그에선가 하코네 온천 랭킹을 나열하며, "오카다 같이 유명한 곳은 사실 물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고, 그 앞에 '후루사토'라는 곳이 나는 오히려 더 좋더라"라고 언급했더라구요.

간판이 눈에 들어오니 그 블로그 내용이 퍼뜩 떠오릅니다.

과연 그 수질은?

 


 

저처럼 히가에리(당일치기)로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여관에 숙박하며 목욕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어요.

참고로 이 후루사토, 정식 명칭은 "나뭇잎 사이 햇살의 여관 후루사토"(木もれびの宿 ふるさと)라고 하는데요.

2023년 연말을 기해 더 이상 히가에리를 운영하지 않게 되었다는 공지가 붙어있더라구요.

한 2주 후면 소리소문 없이 끝나는 후루사토의 히가에리를 우연하게 이용한 셈입니다.

 

아무튼, 물은 괜찮았습니다. 유황 냄새가 어렴풋이 났구요. 노천 풍경도 좋았어요.

저는 역시 5년쯤 전에 겪었던 피부가 미끌미끌해지는 온천물을 잊을 수 없어요. 쿠마모토의 키쿠치 관광 호텔이었는데요.

아무튼 천천히 몸을 담그며, 독감의 남은 증상이 사라지길 기도합니다.

나와서 보니 한 시간 반쯤 지났더라구요.

 

원래는 하코네를 차로 관광해 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사실 하코네에는 등산열차와 버스가 있지만, 시간을 맞추기 번거롭기도 하고,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생각하면 차로 다녀도 재밌겠다 싶었거든요.

아시노 호수(芦ノ湖)를 둘러 봐도 괜찮겠다, 했는데 벌써 시각이 2시 반입니다. 무엇보다 찻길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요.

 

호수는 포기하고, 하코네의 유명한 관광지인 오와쿠다니(大涌谷=おおわくだに)라도 가 보기로 합니다.

수십 km나 달려 하코네에 와서, 마침 차도 있는데, 온천만 적시고 가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오와쿠다니를 목적지로 찍고 출발합니다.

 

유모토를 가로지르는 운전이 짜릿합니다. 길도 좁고, 보행자도 많고요. 경차 빌리길 정말 잘 했다!

중간에 또 작고 예쁜 온천 마을이 있어, 키모노를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더라구요.

지금 보니 유모토보다 조금 더 안쪽, 토노사와(塔ノ沢=とうのさわ)라는 곳이었네요. 다음엔 여기에 가 보고 싶어요.

 

그런데 여전히 구불구불한 왕복 2차로 산길이라 속도가 너무 안 나옵니다.

반대편 차로가 꽉 막혀 있어 보기만 해도 답답합니다.

이쪽 차로는 그나마 좀 뚫려 있지만, 어차피 산길이라 커브가 많고, 돌 때마다 건너편 차 한 대 한 대가 부담입니다.

 

도착 예정 시간이 3시 반쯤 되는데, 도중에 잠깐 멈춰 찾아 보니 오와쿠다니 폐장 시각이 4시라고 합니다.

아, 뭔가 잘 안 풀리네요.

슬슬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한 두 시간만 일찍 출발할 걸. 어제 뭐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계획적이지 못해서 이도저도 아닌 여행, 정말 물에 몸만 담그고 온 여행이 된 것 같아 속상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면 저는 바로 기분이 처지는 편이라, 남이랑 같이 있었으면 분명 괜히 짜증을 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운전대를 잡은 것도 나고, 승객도 나 혼자입니다.

울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해요.

 


 

우선 배도 고프고, 현금이 점점 떨어져 가니, 세븐일레븐을 찾아 갑니다.

후루사토에서 가장 가까운 세븐일레븐까지의 경로.

 

트래블로그의 수수료 무료 현금 인출은 세븐일레븐에서만 가능한데, 세븐일레븐이 좀처럼 없더라구요.

 

세븐일레븐 코와쿠다니점.

 

산중턱의 편의점이라 나름 경치도 좋습니다.

 

나무가 경치를 막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뭐라도 기념으로 남겨야 합니다.

세븐일레븐 코와쿠다니점도 사실은 여행 목적지였다는 듯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명란젓 삼각김밥과 멜론빵, 종이팩 우유를 사서 옆자리에 놓으니 여행 동무가 생긴 것 같고 기분이 좋습니다.

삼각김밥을 우선 먹은 뒤 차를 뒤로 돌립니다.

 

 

 

앞에서 봤던 꽉 막힌 차 대열의 뒤에 내가 섭니다.

여전히 산길이라 커브도 많아 신경쓸 게 많고, 가다 서다를 반복합니다.

 

앞차와의 거리를 바짝 붙였다가, 어라, 좀 실례인가, 하고 그 다음엔 좀 더 여유를 둬 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뒷차는 딱 붙여 세웁니다.

오후 3시, 그리고 하필 일요일이라, 관광과 온천을 마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죠.

머리가 멍해집니다.

 


 

원래 예정은 "에노시마 등대에서 일몰을 보자"입니다.

어제 일정은 "조가시마 등대에서 일몰을 보자"였는데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오늘은 어떨까요?

 

사이드미러 너머로 노을이 집니다.

 

하코네는 요코하마의 남서쪽에 있기 때문에, 사가미 만을 따라 길게 뻗은 1번 국도로 가다 보면 등 뒤에 노을이 집니다.

 

세븐일레븐에서 에노시마까지의 경로. 여기에 나온 소요시간은 무관합니다.

 

에노시마까지는 이제 한 30 km밖에 안 남았습니다. 시속 50 km로 달리면 36분에 주파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은 시간이 1시간 반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또 다른 노을 사진, 그리고 저 멀리까지 줄 서 있는 자동차들.

 

"등대에서 태평양을 내려다보며 감상하는 일몰"이라는 꿈을 이미 한 번 허탕을 치고,

오늘이야말로 에노시마 등대에서 일몰을 꼭 보고 싶은 이 여행객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의 차들은 뭘 이렇게 꾸물댈까요.

 

그러는 와중에도 태양은 맑은 하늘에 수천 가지 붉음을 녹여내며 추락하고 있습니다.

괴테의 비극 《파우스트》를 아시나요? 이야기의 끝에, 주인공 파우스트가 지금의 순간에 너무도 만족한 나머지 시간이 이대로 멎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시간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하며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내 영혼을 거두어도 좋다"라고 했던 바로 그 말인데요.

제 생각엔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일요일 오후의 1번 국도에 데려다 놓았으면 목적을 일찍 이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는 해에게 멈추라고 애원하고, 그 틈을 타 발길을 서두르고 싶은 마음입니다.

 

중간에 무슨 큰 도시나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요코하마, 어쩌면 도쿄까지 가는 차 같더라구요.

교통정체는 풀릴 기미가 없이 이어집니다.

 


 

에노시마 (江ノ島)

44 km를 2시간에 걸쳐 이동한 끝에 에노시마에 도착하니 오후 5시 반입니다.

한국 기준으로는 6시 20분의 해니까 이미 밤입니다.

 

큰길을 따라 음식점이 늘어서 있습니다.

카이센동을 파는 식당도 있고, 센베, 타코야키, 당고, 각종 꼬치구이 등을 팔고 있어,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입니다.

가족인지 친구인지,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등대로 올라가는 길.

 

등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기념품 가게가 잔뜩 있는데요, 오후 6시가 가까워지자 가게들도 하나들 문을 닫습니다.

귀찌를 하나 사고 등대를 향해 올라갑니다.

 

에노시마 등대로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풍경.

 

에노시마 등대에 가니 또 복잡합니다.

사람들이 줄을 잔뜩 서 있고, 직원분이 확성기로 뭐라뭐라 말씀하십니다.

일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데,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는 없다는 것 같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없이도 계단으로 출입 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출입이나 에스컬레이터에 따라 요금도 다르고.

사람들이 한 쉰 명은 줄을 서 있는 것 같고, 정신이 사납습니다.

 

한 번 더 후회를 했죠. 입장권이든 뭐든 미리 좀 알아보고 올 걸!

계단으로 가기엔 좀 피곤합니다. 오늘 운전만 4시간 했어요. 그리고 밤이라 경치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일루미네이션을 한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마음이 내키지가 않습니다.

뭔가에 토라지고 기분이 좋지 않아지면 이렇게 뭐든 싫다고 그러는 습성이 있습니다.

 

언젠가 에노시마에 친구들이랑 올 수도 있으니, 그 때 제대로 봐야지 하고, 줄을 나와 다시 길을 내려갑니다.

 


 

요코하마역으로 돌아와 차를 댑니다.

 

오늘 여행은 좀처럼 잘 안 풀렸고 기분도 꿀꿀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독감은 많이 나아져서 약은 안 먹고 다녔습니다.

 

이건 술이다!

 

숙소로 오는 길에 구글 지도에서 바를 검색합니다.

도심, 역 바로 옆이다 보니 바가 은근 많습니다.

가깝고 평 좋은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바 테일러 (Bar Tailor)

 

아드벡 앤쏠로지 13년 하피스 테일.

 

바 문을 여는 순간 후회가 확 밀려 옵니다. 맞다, 일본은 흡연 자유였지.

가게 안에 담배 냄새가 매캐하게 다가옵니다.

그래도 뭐, 여기서 뒤돌아 나서서 또 구글 지도를 찾아 보고, 헛걸음하고, 그런 건 오늘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냥 마시자.

 

바 자리가 딱 한 곳 남아 앉아, 시그니처 칵테일과 위스키를 차례차례 주문했습니다.

 

바텐더 분과 재밌게 얘기했습니다. 일본에서 바에 와 보는 건 처음인 것도 있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여행이라, 계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술도 신나게 마시구요. 한 네 시간 동안 일곱 잔쯤 마셨더라구요.

 

옥토모어 14.3. 피트 농도는 214 ppm인데, 담배 냄새 때문인지 아리송합니다.

 

바 분위기도 예쁘고 차분하고, 바텐더 분도 친절하고 재밌고, 좋았습니다. 또 가면 갈 것 같네요.

 

바로 왼쪽에 앉은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바텐더 분과 이야기하십니다. 부커스 등 비싼 위스키를 이것저것 마신 것 같았습니다. 배경에 깔린 냄새는 좀 견뎌 보겠는데, 바로 옆에서 피우는 담배는 맵긴 하더라구요.

 

옆 자리에 있던 커플이 돌아가고, 오후 10시 쯤 양복 입은 직장인 두 분이 들어와 앉습니다. 일요일인데?

두 분 중 제 쪽에 앉으신 분이 엄청난 외향인 포스를 발휘하며 말을 걸어오십니다.

이 분은 필리핀 출신인데 중학교 때 일본으로 와서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한 이십몇 년을 살았는데, 영주권인지 뭔지를 얻은 건 의외로 얼마 안 됐다는 얘기, 제가 내일은 치바 쪽을 가 볼까 한다고 하니 본인이 치바 사시는데 무슨 도시락이 맛있다는 얘기, 자기만 이런 게 아니라 가족 대대로 낯가림이 없다는 얘기, 근데 아까부터 바텐더 분의 손기술이 왜 이렇게 멋있냐는 얘기.

한참 웃었어요! 바에 가서 이렇게 바텐더나 손님과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가지고 간 거였는데, 대만족이었어요. 그리고 한 잔 사 주셨습니다.

 

12시가 넘은 요코하마 역.

 

숙소에 와서 잘 준비를 하는데 짐 하나를 놓고 온 걸 깨닫습니다. 바라서 낮엔 안 열겠지만, 다행히 내일 여기서 1박 더 하고 가니 내일 들러서 찾아가야겠다 했습니다.